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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9. <부정공>처사휘종현(연승)가장(處士諱鍾賢(淵昇)家狀)
1. 문헌 목록 〉22. 22世 〉11. <부정공>암농공휘종현가장(巖農公諱鍾玹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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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창암공휘종덕묘갈명(滄庵公諱鍾悳墓碣銘)
滄庵公諱鍾悳墓碣銘 淵齋宋先生講道于溪上而滄庵趙公摳衣請業先生嘉其才智吿以學問循序使之命讀聖學之書公孶孶劇讀所受是極盡棄功令業專工爲己之學學者尊之公諱鍾悳字性薰滄庵自號也其先世爲玉川人上祖諱璋麗朝門下侍中有諱元吉玉川府院君諡忠獻是生諱瑜副正號虔谷當喪紀大壞之世守制以禮屋社之後入杜門洞本 朝累徵不起世宗朝 旌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褒揚忠君孝親也諱智崙察訪篤友昆季諱大春校尉號三灘從遊河西金先生是爲乙巳名儒諱時聖有孝行旌褒即公九世以上也祖諱得燁壽職副護軍考諱亨奎妣豊川任氏相休女先時母夫人得異夢孕公及生性穎悟手有十文長而就傳讀通史過目成誦問難奧意不知不措聲譽籍甚或勸以先捷武科爲仕宦之要路公謝辞己而自言曰自有實學何乃枉費了精力於口耳之學遂贄謁于淵齋先生聞旨訣杜門却掃養親耕讀爲一副規模當乙未削禍改服凝然不動丁外憂喪葬以禮泣血三年乙巳之變宋先生從容殉道公爲心喪朞年繼刊先生遺稿從心石宋公出力復萬東廟儀庚戌以後稱以小華遯人自擬以墨胎元亮之趣辛酉遭内艱公年及耳順不脱衰絰不近酒肉有補於世程者多類此丁卯偶然示憊因以疾革精爽如常而竟以是年八月初三日卒于寝距其生戊午正月初七日享年七十葬于家之左麓向酉原遠近士友執紼奠誄相望於道曰林下宿德亡矣公體幹甚偉聲音洪亮目光炯然望之知其爲君子人也家貧親老菽水之供竭誠無闕待宗族極敦睦内行純備人無間言遇堂從兄弟和氣藹然無父諸姪撫愛如己出飢寒者賙之惜一刺不入官府掛牌秉拂之席未或闕焉謁立齋宋公梳洗宋書剳疑之役與李公克善奇公宇萬宋公炳華友善詩文相酬家居儉約無長物薤塩自給泊如也公之學經傳及程朱書循環熟讀老益勤至於理氣之説一遵先正己定之論性師心第之辦亦有一篇著説及天文曆象而推其至所謂近年新學嚴辞却之見斯道日墜罔極寧欲溘然瓻書而繕寫者以成卷秩所著有東史記畧一部趙氏文獻考二弱藏于家齊陽川許氏暄女有賢行公甞曰家政不替者多内助云曾乳一男不育育三女取弟鍾玹子東洙爲嗣女南陽洪溫星山李相瑀瑞山柳秉源東洙生一男幼四女南原梁春植宜寧南相起餘未字洪溫四男二女景祖景璉景붅景九女朔寧崔成賢南原楊宋燮季未笄李相瑀早喪耦柳秉源二男麒錫麟錫二女幼噫公纘學砥行早播名聲晚有依歸聞道大原矻矻力學可尋古人精義而白遭玄黃易色之變俯仰唏噓既力不能爲遂隱居明經博極群書德氣日 益純粹爲士友推重若使獲用於世必有大異於今俗之人而欝欝未展施而卒惜哉公之嗣子東洙謁公墓銘余感其惻怛之情乃序而銘曰 學以禔身行以爲仁志不溫飽蘊抱邁倫金玉其資大放厥聲潜修密造發爲菁英惟慈幽宅哲人攸藏作善降祥後承必昌 嘉義大夫吏曹參判世子侍講院檢校輔德 驪興 閔丙承 撰 창암공휘종덕묘갈명(滄庵公諱鍾悳墓碣銘) 연재 송선생이 계상에서 도를 강론하니 창암 조공이 옷을 걷어붙이고 배우기를 청하니 선생이 그 재주와 지혜를 아름답게 여겨 학문 순서로서 고하고 聖學의 글을 읽기를 명하니 공이 부지런히 많이 읽어 받은 자가 이에 극진하여 공령업을 버리고 爲己之學을 전공하니 학자가 존경하였다. 공의 휘는 종덕이요, 자는 성훈이며, 창암은 그 자호이고, 선세는 옥천인이었다. 상조 휘 장(璋)은 고려조 문하시중이요,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은 옥천 부원군으로 시호는 충헌이며, 생휘 유(瑜)는 벼슬이 부정이요, 호는 건곡이며 喪禮가 크게 무너진 세상을 당하여 상제를 예로서 지키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두문동에 들어가 이조에서 여러번 불러도 가지 아니하니 세종조에서 그 문을 정포하되 효자 전부정 조유의 이문이라 한 것은 대개 임금께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한 것을 포양한 것이다. 휘 지륜(智崙)은 찰방으로 형제 우애하였으며 휘 대춘(大春)은 교위로 호는 삼탄인데 하서 김선생을 종유하여 을사년(乙巳年) 명유가 되었고, 휘 시성(時聖)은 효행이 있어 정포하였으니 곧 공의 九세 이상이었다. 조의 휘는 득엽(得燁)인데 수직으로 부호군이요, 고의 휘는 형규(亨奎)며 비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상휴(相休)의 따님이시다. 선시에 모부인이 이상한 꿈을 얻고 공을 잉태하였는데 출생하매 성정이 영민하고 손에 十자 문채가 있더니 커서 학당에 나가 「통감」을 읽으며 눈으로 보면 능히 외우고 어려운 것과 깊은 뜻을 물을 때 알지 못하면 놓지 아니하니 칭찬이 자자하였다. 혹 먼저 무과를 보는 것이 벼슬한 자의 요긴한 길이라 권하니 공이 사절하고 스스로 말하되 스스로 실학이 있는데 어찌 이에 정력을 실익이 없는 학문에 허비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폐백을 가지고 연재 선생께 나아가 뜻과 요결을 듣고 문을 막고 세상 티끌을 물리쳤다. 어버이를 봉양하며 밭갈고 글 읽는 것은 한 가지 규모요, 을미년(乙未年) 머리 깎을 때 엄숙하게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부친 상사를 당하여 예로써 초상 장사를 모시고 三년을 피눈물을 흘렸으며 을사년 보호조약 때 송선생이 태연히 순도하니 공이 이를 위하여 一년동안 心喪을 입고 이어서 선생 문집을 간출하고 심석 송공을 쫓아 힘을 써 만동묘 제도를 회복하였다. 경술년(庚戌年) 이후에 소 중화에 숨은 사람이라 말하고 스스로 백이숙제의 지취에 비겼다. 신유년(辛酉年)에 내간상을 만나 공의 나이 六十세나 최질을 벗지 않고 주육을 가까이 아니하였으니 풍속을 교화시키는데 보탬이 된 것이 이와 같이 많았다. 정묘년(丁卯年)에 우연히 몸이 노곤한 것이 병이 되어 위독하다 정신이 여전하더니 마침내 이해 八월 초三일에 향년 七十세로 별세하니 집의 왼편 기슭 향유원에 안장하는데 원근 사우가 상여줄을 잡고 제문을 지어 전을 올리며 길에서 바라보며 말하되 「隱逸宿德이 죽었다.」하였다. 공이 신체가 건장하고 소리가 크고 맑으며 눈빛이 빛나 바라보면 군자다웠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으나 지체의 봉양을 정성을 다하여 궐함이 없고 종족을 대접함이 극히 돈독하여 내행이 순비하니 사람이 군말이 없고 종형제를 만나면 화기애애하였다. 아비 없는 조카를 자기 소생 같이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주리고 찬 자는 진휼하며 명함을 관부에 들이지 않고 패를 걸고 잡고 도운 자리에는 혹 빠지지 아니하였다. 입재송공(立齊宋公)을 만나 소세하고 송서답의 역사를 마치고 李公 克善, 奇公 宇萬, 송공 병화와 더불어 착한 벗이 되어 시문을 서로 수창하였다. 집에는 검약하여 남은 물건이 없고 솔과 젓깔은 자급하며 물욕이 없었다. 공이 배운 경전과 程朱書를 두루 읽어 늙도록 더욱 부지런히 하고 理氣説에 이르러서는 선정의 정론을 따르며 성사 심제의 변과 저설 및 천문 역상이 있고 이른바 근년 신학은 엄격히 사각하였다. 우리의 道가 날로 떨어짐을 보고 망극하여 차라리 술과 글에 잠기고서 기워서 쓴 것이 권질을 이루어 저술한 바가 東史紀略 一부와 조씨 문헌고 二국이 있어 집에 수장하였다. 배는 양천 허씨(陽川許氏) 훤(暄)의 딸로 어진 행실이 있었는데 공이 일찍 말하되, 「집안 다스린 것이 폐하지 아니한 것은 내조가 많았다.」하였다. 아들이 없어 조카 동수(東洙)를 양자하고 딸은 남양(南陽) 홍온(洪溫), 성산(星山) 이상우(李相瑀), 서산(瑞山) 유병원(柳秉源)의 처며, 손자 一남은 어리고, 四녀는 남원(南原) 양춘식(梁春植), 의령(宜寧) 남상기(南相起)요, 나머지는 미혼이고 다기록 아니한다. 슬프다. 공이 이룬 학문과 닦은 행실이 일찍 이름을 날리고 늦게 의지할 곳을 두어 도를 선생께 묻고 몸이 못 쓰도록 힘써 배워 가히 옛사람의 정밀한 뜻을 찾고 스스로 천지가 변색한 변을 만나 엎드리고 우러러 탄식하되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숨어 살며 경전을 밝히니 덕기가 날로 더욱 순수하여 사우의 추증한 바 되었다. 만일 세상에 쓰였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크게 다른 것이 있을 터인데 답답하게도 세상에 베풀지 못하고 졸하였으니 아깝도다. 공의 사자 동수가 공의 묘명을 정함으로 내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이에 서하고 새겼다. 배움으로서 몸을 복되게 하고 學以禔身 행함으로써 어진이가 되어 行以爲仁 따뜻하고 배부른 생각을 아니하고 志不溫飽 싸고 안은 것이 무리에 뛰어났다. 薀抱邁倫 금옥의 그 자질로 金玉其資 크게 명성을 떨쳤다. 大放厥聲 잠심하여 닦고 정밀하게 지어 潜修密造 빗난 꽃 부리로 발양하였다. 癸爲菁英 오직 이 유택은 惟玆幽宅 어진 사람이 묻힌 곳이네. 哲人修藏 착한 일을 하여 상서를 내리니 作善降祥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리라. 後承必昌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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